여기 켈리 페츄리아 프리즌은 이민국 가기 전 교도소로 임시 우리가 있지만, 레벨 4로서 우리도 똑 같이 프로그램을 해서 얼마나 숨 막히는지, 지난 두 달 동안 여기서 살면서 2년을 산 기분이 든다. 그리고 보통 야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30년, 40년, 50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집에 영원히 못가는(가석방 없는 종신형) 31세의 한인형제도 보았고 또 30~60%가 여기 레벨 4에서 종신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난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주셔서.
당장 12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요 며칠간 머리를 썩히며 오래된 기억들을 기억해가며 손이 저릴 정도로 글을 썼다. 마침 하나님께서 나에게 글을 쓸 기회를 주셨다. 그동안 시간이 없었다. 운동한다, 사람들하고 이야기 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마침 내 벙커(침대 같이 쓰고 있는 필리핀 애)가 경찰의 실수로 다른 빌딩으로 옮겨졌고 나 혼자 방을 쓰다 보니 조용히 글을 쓸 기회가 생겼던 것이었다. 이 또한 주님의 은혜이다. 난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예정이다. 그 길만이 나의 살길이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종종 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정말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고 또 그랬다. 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누나 셋이 있는 집에서 아들은 나 하나로, 남자라고 누나들의 따돌림 속에서 방도 혼자 쓰고 항상 혼자 생활하며 커왔다. 사춘기가 되었을 무렵, 중학교 1학년 때 운동선수들끼리 만들어 가입하고 있던 씨름 선수 써클에 가입하고 만다.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외로움에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써클은 고등하교 선배들에 의한 계획으로 00조직으로 이름을 바꾸어지고 우리의 선택이 아닌 선배들의 선택에 의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된다.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는 절대로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방과 후 선배들이 교문에 와서 지켜 서있었고, 담장 넘어 도망가려 해도 학교 안으로 찾아오기에, 어린 나이에 겪기에는 큰 실수(서클 가입)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다른 선배들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인사법, 행동강령 등을 철저히 교육받게 된다. 절대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는 나의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던 대학을 포기하고 운동선수와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 낮에는 도장으로 사업장으로 그렇게 살다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사업을 다 하기 시작한다. 술집 지배인, 룸싸롱, 커피숍, 광산, 골재 채취, 사채업, 나이트클럽, 카드깡, 청량리 덤핑시장에서 양주 전국 도매업 등 온갖 악한 짓은 다 하고, 선배들에 의해 만들어진 중학교 시절의 조직의 핵심세력으로 막강한 돈을 내세워 등장하고, 전과자의 별을 달고 또 달고 10여년 한국에서의 교도소 생활 등으로 가족, 부모와의 마찰을 겪는다. 성격은 점점 포악해져가고 그러면서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큰 집에 외제 차에 가정부, 비서까지 두고 살게 된다. 그렇지만 그러는 동안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내와의 갈등을 겪게 된다. 그래도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오합지졸의 몇 십 명, 몇 백 명씩의 다른 조직들을 흡수 통합하고 지금도 거대한 조직인 친구00 조직도 같이 통합하는 일을 해내고 그것을 토대로 거대한 야망을 꿈꾼다.
한국에서 제일 많은 명수의 조직원을 거느리는 보스가 되는 게 나의 꿈이었다. 그 당시 그게 나의 삶의 목표였다. 아내가 눈물로 매일 기도하고 목사님을 집으로 불러 들여 안수기도를 할 때면 고개 숙여 받고 그리고 바로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런 생활을 하던 중 아내의 반란을 겪는다. 그리고 또 한국에서 이야기 하면 다 아는 큰 사건이 동생들에 의하여 세 건씩이나 발생하고. 그길로 나는 은퇴식을 하고 뉴질랜드로 아내와 아이와 함께 떠났다. 그 모든 것을 잃어도 결코 가족은 잃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또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 아내의 반란을 겪게 되고 아내는 여기 미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쓰는 글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란 책을 썼고, 다른 소설가들이 지금 정리 중에 있다. 여기에 쓴 글은 내가 차츰 크리스찬 (하나님을 믿는 순종하는 사람으로 점점 변하게 되는 사실을 씀)으로 되어가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썼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선교사가 될 것이라고 우리 가족 그리고 부모님이 생각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변하여 이렇게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했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힘이 큰가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신학도 공부해서 모든 것을 마쳤다. 그러나 난 겁부터 난다.
내가 한국에서 했던 그 못된 죄들을 그들은 과연 용서를 할 것인가 말이다. 성경대로 하면 회개하면 난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공부를 통해서 안다. 그렇게 나는 이제 나를 반겨줄 나의 고국으로 거의 9년 만에 프리즌 생활을 마치고 간다. 내 인생 50에서 19년 3개월이란 삶을 여기저기 교도소에서 지냈다. 내가 얻은 것은 지금 들고 있는 성경책 하나이다. 모든 것을 잃고, 지금에 와서 절대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어. 나 자신에게 말한다. 지금 그냥 한국에 가면 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 똑같이 살게 되고 악하게 그리고 교도소를 내 집처럼 또 살거야. 그러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께 맡겨 봐. 내 주관대로 사는 게 아니라 그분 주관대로 살아 봐. 그 분의 테두리 안에서 그분 손을 꼭 잡고 살아 봐. 그러면 영원히 너는 행복을 손에 쥐고 살거야. 너 자신이 다시는 여기 안 들어 와가 아닌 다시는 하나님 손을 놓지 않을 거야 해봐. 그러면 되는 거야 주님은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넌 용서들에게 간증해 봐! 그리고 그들이 돌을 던지면 맞아, 또 맞아. 절대로 고개 들지 마. 그러면 네가 변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거야. 그렇게 살아봐. 미국에서의 힘든 교도소의 삶과 받을 수 있어. 그래!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가 모든 사람한국 교도소의 삶을 정리해서 간증의 글을 써봐 그리고 간증해. 무릎 꿇고, 무릎 꿇고,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해. 너의 죄를 모두 사함을 받아. 주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 봐. 넌 할 수 있어. 널 사랑하는 주님이 있기 때문에. 아멘. 그렇게 난 미로의 끝에 서 있다. 그 밝은 빛을 보기 위해서. (끝) ☕
– 켈리 페츄리아에서 10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