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경험에 의하면, 꼭 한국 사람들이 많아지면 뭉치지 못하고 편이 갈라지고 서로 죽도록 헐뜯고 싸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 그곳에서 한국 사람들의 아귀다툼을 보게 된다. 뭉쳐서 잘 살지 못하고. 그래서 나 또한 그런 민족성을 알기에 고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한인들과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지금도 남과 북이 나누어져 피 튀기게 싸우고 헐뜯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우리 젊은이를 46명씩이나 생으로 수장시키지 않았나, 천안함 사건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핵폭탄까지 개발해서 그것을 어디에다 쓰겠다는 것인지, 우리나라는 왜 독일처럼 통일을 못하는지, 통일은 못하더라도 싸우는 것을 이제는 그만해야 하지 않는가.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켜 우리 한인 동포 300여만 명을 굶주림으로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는 28살 난 그 아들을 내세워 정치를 이어서 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개발한 핵폭탄을 써서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인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같은 숫자 300만을 또 죽여서 채우겠다는 것인지. 신문에 난 이들 세 부자 사진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느끼고 느낀다. 그리고 솔직히 그들 이름이 똑같이 “K”라서 싫다. 자! 그들 세 부자 문제는 하나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화가 나니, 하던 이야기로 넘어 가자. 한국 사람이 못 뭉치는 문제로 이제 넘어갈까 한다. 내가 여기 들어온 돔 211호 CRC 프리즌에는 최부자(가명) 61세, 한정(가명) 58세, 심통(가명) 45세, 김약(가명) 29세, 그리고 나 KJ 44세 이렇게 다섯 명이 살게 되었는데, 이중 나이가 제일 많이 드신 최부자님께서는 LA에서 골프 연습장과 큰 옷매장을 하시다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를 잘못 건드려 강간으로 15년형을 받고 7년째 살고 있었고, 두 번째 나이 드신 한정씨는 한국군인(보안대)에서 상사로 오랜 세월 지내다 어찌 어찌하여 LA까지 오셔서 택시운전과 놀음으로 반건달 생활을 하다가 친구 분들과 술 드시고 차 뒷 자석에서 세 명이서 권총을 들고 자살을 하네 마네 하다가, 그 권총이 격발이 되어 그중 친구 한 명이 죽었고, 그 사건으로 10년형을 받으셨고, 심통은 한국에서 J대학을 나오고 군대에서 헌병 출신으로 LA에 와서는 은행사기전문(첵)을 하다가 여기가 벌써 두 번째로 전과자 신세가 되어 7년 딜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김약은 스피드라는 마약을 피우다 걸렸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마약을 했는지 약간 나사가 풀린 그런 청년이었다.
그 상황에 내가 들어갔으니, 그 돔은 만물상이 되었다. 강간범에 살인범에 사기꾼에 마약꾼에 깡패까지 골고루 잘 섞여서 재미있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돔에는 100명이 기거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국 사람이 5명, 베트남 2명, 이란 1명, 말레시안 1명이 있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끼리만 밥 먹으러 다니고, 다른 아시안 인종과는 별로 말을 안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최부자와 심통은 나란히 옆침대(1층)를 쓰고 있었고, 최부자 위의 2층에는 김약이 기거하고 심통위에는 멕시칸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통이 운동하러 가려고 주섬 주섬 이것 저것을 챙기고 있을 때 내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심형님, 바로 옆에 한국 사람끼리 나란히 침대를 써서 정말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 해가며, 비록 우리가 프리즌에 있지만 재미있게 살겠습니다” 나보다 두 살 위의 사람이라 정중하게 말을 했는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하는 말, “나중에 이야기하지, 동생”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최부자가 기거하고 있는 침대를 노려보더니 물통과 운동복을 챙겨 입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당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최부자가 점심 먹으러 돔에 잠시 들렀다가 나를 불렀다. “Mr. K, Mr. K” 나에게 손짓을 하며 급하게 부르는 최부자에게 다가갔다. “저, 저를 부르셨습니까?” “응, Mr. K, 동생 K에 대해서는 말이지 신문이나 사람들한테서 이야기 들어 잘 알고 있지.” 그리고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말이야, 한국에 조폭 김태촌이도 알고 조양은이도 알아. 그리고 여기 LA 조직두목 000도 새해에는 나에게 인사를 오고한다네. 그렇게 이곳 LA에서는 내가 큰 유지인 셈이지. 그런데 내가 여자 잘못 건드렸다가 큰 누명을 쓰고 여기에 왔네. LA사람들은 내 사건을 다 알지. 어흠!” 하면서, 이 최부자께서 나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인지 헛기침을 하고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나를 아래위로 쳐다 보았다. 성질이 매우 급하고 잘 참지 못하는 편인 나로서는 이 최부자님 말이 꼭 자기가 조직이나 깡패 또는 건달이라고 하는 것 같아 보여서 내가 말을 막고 물어 보았다. “저, 최형님, 혹시 최형님께서는 LA 어느 식구, 조직이나 건달이십니까? 제가 알고 있어야 편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니 오해는 마십시요. 제가 비록 지방에서 왕초 노릇을 좀 했지만, 사람 수로는 전국 어디에 가도 안지고 큰 소리치고 살았습니다. 그게 젊어서는 정말 멋이고,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솔직히 그랬던 내 삶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물었는데,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무슨 이 나이에 조직이야? 그리고 식구라니, 식구가 뭐야? 그게 무슨 뜻이야? 그, 그냥 조직세계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는 손사래를 치면서 내게 바짝 다가와 말을 이어갔다. “저, Mr. K, 그쪽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하고 우선 지금 여기 한국 사람들 문제부터 이야기하지. 동생, 자네가 그쪽 지방에서 대장자리까지 했고, LA에 몇몇 사람들도 자네를 알고 있더구먼. 그러면 건달인데, 건달은 의리가 있어야 건달이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야 되는 게 건달이야. 그렇지 않나? 동생.” 그리고는 이 최부자님께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친근감 있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는데, “저기 말이지, 동생.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꼭 싸우고 시기하고 또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고 해서 지난 7년 동안 어디를 가나 그저 혼자 지내고 했었는데, 여기서도 근 2년간 혼자 지내고 있었다네. 그런데 말이지.” 하고 말을 이어갔는데, 얼마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라 TV며 음식, 그리고 신발들을 다른 인종들이 훔쳐가서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돔에 있던 심통을 데려 왔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을 모으면 힘이 커지기 때문에, 그리고 보안대 출신인 한정씨와 젊은 애 김약도 자기 벙키가 필요해서 데려와서 그렇게 4명이서 같이 잘 살고 있었는데, 자기가 패키지도 매달 받고, 켄팅도 많이 가고 하는 것을 다른 한국 사람들이 시기하고 같이 식사도 안한다고, 자기를 미워하고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하는데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Mr. K, 내 성이 최씨야, 이놈들이 최씨가 얼마나 강하고 독한지 몰라서 그래. 징역을 살면서 누가 한국 사람이라고 같이 먹어야 돼? 징역은 따로 따로 사는 것이야. 그래서 지금 여기서 서로 한국 사람끼리 말을 안 하고 있어. 아! 동생. 이야기 해봐. 동생이 판단해서 이 문제 좀 잘 해결해봐. 옆 침대에다 데려다 놓았더니, 저 어린놈이 매일 같이 나를 노려보고, 말끝마다 톡톡 쏘고, 아주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내가 죽겠어.” 그러고는 최부자가 천정을 쳐다보고 긴 한숨을 쉬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뭘 어떻게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판사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잘못 했는지는 모르지만 더 긴 이야기 안 해도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처음 돔에 왔을 때, 심통이 사과도 깎아서 최부자께 대령하고, 식사 끝난 후 그릇까지 그리고 침대 청소까지 하는 것을 보고 참 보기 좋았었는데, 내 침대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세세한 그들의 사이는 내가 잘 몰랐었다. 성질이 급한 나는 단순히 판단해서 말했다. “저, 최형님, 그러면 락커 열어서 먹고 싶은 것 먹으라고 하고 같이 먹으십시요. 방구깨나 꾸는 건달들 조직 데리고 계셨다면서요?” “응? 응? 그런데 왜 갑자기 그 말을…“ 최부자는 내가 갑자기 건달들 데리고 있었다면서요 하고 묻자,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갑자기 하냐는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어 왔다.” “아! 최형님, 형님이 윗 조직 형님이신 다음에야 한 조직에 보스로 있는 사람들이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를 때는 떨어지는 게 있으니까 부르지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부르지 않습니다. ‘형님’이라고. 형님이 돈깨나 주셨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응, 응, 그, 그렇지. 많이 줬지.” 그리고는 최부자가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이상하게 안보아도 거짓말로 보였다. 아니, 줄 분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돈 몇 푼 때문에 저 머리를 썩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니올시다였다. “최형님, 그럼 돈깨나 동생들에게 주셨을 것인데, 여기서 패키지 켄팅 그것 얼마나 합니까? 동생들 먹여 살리는 게 그게 아까우십니까? 왜? 최형님! 동생들을 왜 여기 불러 들이셨습니까? 저 동생분들 솔직히 형님의 총알받이 보디가드 아닙니까? 그러면 충분히 보상도 있어야지요. 저 동생들 여기 오고는 이제 형님 물건 훔쳐가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보니 저 (심통)형께서 사과까지 깎아서 대령하고 거기다가 아침저녁으로 90도 각도로 인사까지 드리던데. 저는 그렇게까지 못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만일 말이지요. 저에게 저런 동생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와서 인사하고 깍듯이 대해준다면 전 제 간도 빼주겠네요. 이렇게 말이지요.” 그리고는 내 옷을 들어 올린 후, 배에 손을 대고 간을 꺼내 주는 시늉을 했다. “왜 조직에서는 형님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고, 동생이라는 말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고 계시지요? 알고 계시지요?” 내가 재차 답을 듣기 위해 최부자님께 재촉을 하였다. “응? 왜? !!!” 갑자기 묻는 내 질문에 뚱딴지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거기에서 벌써 이 최부자님께서 그쪽 세계에 대해서 아주 문외한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다니요. 어르신 앞에서 감히 이 말을 할 수는 없고 속으로 했다. 그러니 서울의 누구누구 알고, LA 누구누구가 동생이라고 하는 말은 조사를 안 해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최형님! 동생이 형님이라고 부를 때는 그 형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총 그룹으로서 식구생활을 하는 조직에서는 이유 없이 무조건 형님이어야 하고 그렇다고 형님이라고 해서 무조건 동생들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님의 의무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동생을 진정으로 자기 친형제 이상으로 생각하고, 피를 나눈 동생으로써 동생의 안전을 자기 목숨처럼 아낄 때 비로소 ‘동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식구생활을 하는 조직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룰대로 그렇게 되지만, 밖에서 사사로이 만난 사람들에게는 ’형님‘, ’동생‘이라는 단어를 그 세계 사람들은 결코 잘 사용치 않습니다. 그게 건달세계의 형님과 동생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내 말은 이어져 갔다. “최형님, LA에 2003년 6월경 잠깐 증인문제로 카운티 젤에 갔다가 2주후 다시 와소코리셉션 센터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갔다가 몇 몇 아는 동생들도 보았고, 친구와 선배도 만났었습니다. 한 돔에 한국 사람만 30여명이 있었고, 다른 아시안도 30여명이 함께 아시안 돔이라고 해서 따로 쓰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다들 형님 동생이란 호칭을 쓰길래 아는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미국에서 7번씩이나 들락거린 그 동생의 말에 의하면, 밖에서 청소를 하든, 페인트나 사기를 치다 들어 왔어도, 건달이나 깡패도 모두 여기에서는 나이 순서대로 형님 동생의 호칭을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 동생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안(프리즌)에서 다른 민족에게 대응하기 위해, 여기 캘리포니아 전 프리즌에서 오래 전부터 한인들이 그러한 룰을 만들어 밖에서는 식당 주방 일을 했건 말건 이 안에서는 따로 프리즌 갱뱅(조직)이 되어 그 사람이 아저씨이건 할아버지이건 직업이 무엇이건 서로 묻지 않고 그렇게 서로 존중하고 호칭을 부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타민족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비록 밖에서는 아저씨이지만 이 안에서는 뭉쳐야 살기 때문에 아저씨일망정 여기 LA에서 갱 생활하는 동생들도 인정을 해주고 형님이란 호칭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안하는 데도 몇 군데 프리즌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아는 곳 여러 군데 다녀 봐도 다들 그런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오래 사는 동안 어딜 가도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어딜 가든 그분이 누구이건 거의 군대 다녀오고, 한국 사람들 중에 덩치들이 있기에 서로 뭉쳐 형님 동생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추고 이 최부자님을 어떻게 잘 설득시킬 궁리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한국 사람들이 재미있게 같이 음식도 해먹고 오손 도손 지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최부자님만 잘 설득하면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최부자님을 기분 좋게 띄워줘서 설득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저, 최형님! 그래서 저 또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최사장님이라고 안부르고 최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LA에 왔으니 LA법을 따르는 게 당연하지요. 그리고 저 심통형이 비록 밖에서 사기를 쳐서 들어왔다 해도 여기서는 최형님께서 최고 연장자이고 이 안에서는 한 조직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비록 깡패 깡자도 모르는 분이지만 최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최형님이라고 저 심통형께서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직에서 하는 모든 시늉은 다 내서 저도 깜짝 놀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 형도 45살이나 먹었지만 최형님에게 꼬마가 되어 침대 청소며,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까지 드리니 그 얼마나 멋있고 좋습니까? 최형님! 그런 동생을 두고 여기 켄팅 음식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은행에 돈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면서요? 그런데 뭘 아끼시려고 합니까?” 여기까지 장황하게 설명을 들은 최부자님께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한 건 했다고 생각했다. 최고집을 설득했으니 내 이빨도 대단한 이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이 나서 더 확실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히든카드의 말을 이어갔다. “최형님! 형님에게 오늘 어떤 문제가 일어났다고 하십시다. 가령 저쪽 멕시칸이 칼을 들고 형님을 찌르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동생들이, 칼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싸움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정합니까?” 대답을 듣기 위해 물었다. 오랫동안 내말을 경청하며 수긍하던 최부자님께서 기분이 아주 좋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그럼, 암 그래야지. 한국 사람 좋다는 게 뭐야. 당연히 그래야지” 이때다 싶어, 내가 웃으며 최부자님께 바싹 다가가 마무리 펀치를 위해 말을 건넸다. “최형님! 그렇게 형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형님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위해 여기서 돈 몇 십불씩 한 달에 한 번 쓰시는 게 뭐가 부담이 되십니까? 그러니 그러지 말고 이제 동생들을 좀 사랑하시지요.” 내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강요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갑자기 최부자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래, 동생 말 참 일리가 있어. 그렇지만 말이야 돈이나 음식은 절대로 하나도 줄 수가 없어. 바깥 같으면 저런 놈들 감히 내 앞에 와서 나하고 말도 못할 주제들인데, 여기가 징역이다보니 내가 이렇게 상대를 하고 있지. 내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줄 알아? 돈 많기로 소문난 사람이고… 그리고…”
그날 말주변이 별로 없는 내가 최선을 다해 설득을 시켰는데 결국에 쓰리고에 피박까지 썼다. 우리 나이 드신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약간 이상한 행동을 하고 대우 받으려고 큰소리 치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뒤에서 ‘꼰대’라고 놀린다. 쉬쉬 하면서.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드신 분들을 그렇게 호칭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 사람들이 젊고 혈기 있게 이상한 행동을 하고 예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한다. 이게 한국 사회의 병폐다. 더 이상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알 것이다. 그렇게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하며 장장 6개월 간의 긴긴 싸움을 같은 한인끼라 하고 있던 중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 또한 정신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한 사건이 발생했다.